노자의 도덕경은 도경道經과 덕경德經을 합쳐 총 81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이 도덕경이 진짜 노자가 쓴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보태어 완성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역사적 검증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노자 자신이 쓸 때도 노자는 누가 썼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썼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완전히 이해하여
나와 똑같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말한다면, 그 말은 누구의 말이든 상관없이 내 말과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내가 <날개는 없지만 비행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든다면 우리는 하늘도 갈 수 있다>고 말했다면,
그리고 누군가가 <날개가 없어도 비행기를 타면 하늘을 날 수 있다>라고 한다면 그 말은 내 말이든,
다른 사람의 말이든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같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달라도 의미가 같기 때문입니다.
결국 짧은 글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감춰 있는 세계가 같다면 그것은 누가했건 상관없이 모두 같은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진짜 노자가 한 말이라면, 그리고 다른 말 속에 그와 같은 세계가 들어 있다면
그것은 누가 했건 모두 노자의 도덕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노자의 글인지 아닌지는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이미 여러분이 충분히 이해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같은 말이 반복된다면
그때는 그 말을 건너뛰고 다른 문장으로 넘어갈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이 도덕경은 노자라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전 우주를 통해 우리의 삶이 가장 온전하도록 노력한 글이라면, 지금의 우리는 그보다
더 나은 삶이 되도록 노자의 지혜에 덧붙여 노자의 세계가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 위에 더 나은 삶이 되도록 하자는 의도에서 지금 도덕경을 강의하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은 도덕경 두 번째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도덕경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합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라 이름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다.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
그러므로 욕심을 내지 않으면 그 오묘함을 볼 수 있고
항상 욕심에 차 있으면 그 나타남만 볼 뿐이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차량자 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이 두 가지는 같이 나와 이름만 다를 뿐 한마디로 현묘하니
신비하고 신기한 모든 신묘의 문이다.
지난번 강의에서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입자의 세계>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움직이며 작용하는 <파동의 세계>,
그리고 육체의 5관으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하여 유추하는 <관념의 세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관념>이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관념 이전의 세계를 통해야만 그 진실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관념 이전의 세계를 통해 우주의 실체를 아는 것을 <도道>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말도 언뜻 들으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 매우 어려운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한쪽 방향으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집니다. 어느 호숫가에 있는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몇 분 후에 다시 보니
그 낙엽은 옆으로 이동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의식이 보고 생각하면 본인이 걸어서 움직이듯
낙엽 또한 스스로 움직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입자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가 더 향상된 사람이 보면 그 낙엽은 스스로 움직여 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떠밀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낙엽은 얼마 후 다시 호수 물에 떨어져 물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도>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작용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낙엽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바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낙엽은 반드시 바람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파도치는 물도 낙엽을 떠다니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도>의 세계 역시 변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관계를 잘 생각해서 도덕경을 다시 봅시다.
도라 이름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 낙엽이 바람에 의해 움직인다고 했지만 물도 역시 바람처럼 낙엽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바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바람>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다.
형체가 없어 이름 지을 수 없는 작용은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위한 시작이고, 이렇게 눈에 보이게 나타난
형체는 모든 만물의 모체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작용이 곧 <도>이고, <도>는 천지가
만들어지기 위한 시작이며, 이렇게 생겨난 <입자>는 만물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내지 않으면 그 오묘함을 볼 수 있고
항상 욕심에 차 있으면 그 나타남만 볼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 또한 보이지 않는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자의식의 욕심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면 그 작용의
오묘함을 알 수 있지만 자의식의 욕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오묘함은 알 수 없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형체만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도덕경이 진짜 노자의 글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이와 같이 <도>를 통해 만들어진 우리의 자의식이 눈에 보이는 것만 볼 수 있기 때문에 문제 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의식이 아닌 <기감>으로 느낀다면, 보이지 않는 오묘한 우주의 이치를 알 수 있지만,
자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낙엽만 보일 뿐 그 작용의 실체는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는 같이 나와 이름만 다를 뿐 한마디로 현묘하니
신비하고 신기한 모든 신묘의 문이다.
이렇게 <보이기 위한 작용>과 <보이는 상태>는 결국 아프락사스의 한 몸으로 두 가지가 따로따로 나타나는
묘한 관계인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아프락사스의 묘한 작용에 의해 창조되며, 만물은 아프락사스에 의해 생겼다 없어지길 반복하는 것이다. 아프락사스는 곧 모든 만물이 탄생하고 사라지는 신묘한 문이다/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위 도덕경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이 어딘가 모르게 좀 어색한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바로 아프락사스의 서로 다른 양방향을 한 방향으로 설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두뇌는 양방향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더 정확하게 양방향으로 설명한다면 그것은 바로 노자가 말한 <도덕경>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단순해서 양방향을 동시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프락사스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해했다고 하는 <이해>는 바로 한 방향으로 설명했을 때 나타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이해의 세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노자가 말했듯이 자의식의 욕심으로 알려고 하지 말고
자의식이 쉬었을 때 저절로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실체의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기감능력>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자의식의 욕심을 내지 않기 위해 <명상>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명상은
자의식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쉬어 우주의 실체를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힘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힘을 쓰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짜 힘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차라리 부딪치고 써야 하는데,
그러자면 영혼은 쉬지 않고 계속 작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기감능력>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원리를 모르고 사람들은 단지 관념적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 있는
현실을 바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도>는 자세나 호흡과 상관없이 영혼을
통해 전 우주를 느껴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를 터득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우주의 이치를 알길 원한다면 그 길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먼저, <죽어도 알아야겠다>는 마음의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꼭 알길 바라면 그 각오는 반드시 영혼에 각인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전체가 <눈>이 되어 세상을 살피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을
살피던 어느 날 문득, 바라보는 세상에 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자신은 죽어버릴 것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답>이 눈앞에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찾던
답은 자신과 우주가 하나가 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석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사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시간에 맞추어 열심히 사는 사람은 굶어 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짜 부자는 그렇게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일을 마치기 위해 밤새워 일하는 사람과, 부를 끌어들이기 위해 잠 안 자고 일하는 사람은,
눈으로 보면 똑같이 잠 안 자고 일하는 것 같지만 그 흐르는 에너지는 방향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일을 마치기 위해 밤일을 하는 사람은 <수동역>적인 사람이고, 부를 위해 잠 안 자고 일하는 사람은
<능동역>적인 사람인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능동역으로 사는 사람은 필요한 것을 찾아가는 자의식적
<눈>이 아니라, 기감을 통해 전체를 한눈에 보는 <전체의 눈>을 갖추는 것입니다.
전체의 눈은 척~보면 알고, 쓱~보면 상황을 파악하여 딱~하고 정곡을 찌르는 <척, 쓱, 딱>입니다.
이렇게 <전체의 눈>은 영혼의 일곱 가지 기능을 통해 느끼는 <기감>입니다. 그래서 현재도 보고, 과거도 보며,
미래도 봅니다. 영혼의 일곱 가지 기능은 사랑, 감정, 레벨, 원기, 성적 매력, 신체 기능 등 모두를 한 번에
느끼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되길 바라는지 등 여러 가지 상태를 한눈에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고, 또 저렇게 하면 어찌 된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감능력을 통한 전체의 눈입니다.
옛날 중국의 병법가들은 이와 같은 <전체의 눈>을 갖추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습니다.
제갈공명이 가장 존경하였던 위대한 병법가 장량은 유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하였지만 훗날 유방이 자신을
죽일 것을 알고 유방이 찾지 못할 곳에 가서 평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장량이 도망간 곳은 바로 <장가계>이며,
장가계는 마치 신선이 사는 곳처럼 신비해 보이기까지 한 절묘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체의 눈>을 갖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을 각오로 추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죽을 각오로 추구하는 마음 상태를 『싸이파워』라고 합니다.
『싸이파워』는 원하는 것을 영혼에 각인시켜 놓은 상태이므로
이때는 반드시 <전체의 눈>이 작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게를 하는 사람은 손님이 쉽게 올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갖추고,
또 손님이 어떤 것을 좋아할지
가늠하여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체의 눈이 작동하면 원하는 것은 반드시
현실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꿈일 뿐이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영혼에 반드시
각인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싸이파워』는 바라는 그것이
아무리 비현실적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현실에
나타나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싸이파워』를 한 상태에서는
그것이 실현되도록 <전체의 눈>을 작동시켜
보이지 않는 곳까지 구석구석 점검하는 세심함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았다면 여러분도 반드시
<전체의 눈>이 갖추어지도록 간절하게 바라는 것을 영혼에
각인시키기 바랍니다.
그럼 오늘 강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글 제공 : 육각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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