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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

오쇼 라즈니쉬의 탄트라 수련법 - 제3의 눈에 집중하라

by 싸이원 2019.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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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으 탄트라 강연 중에서




미간(眉間)에 집중하고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 전의 상테에 머물게 하라.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精髓: prana)로 가득 차게 하라. 

그리고 정수리에서 빛이 쏟아지듯 호흡의 정수가 쏟아지고 

있음을 느껴라. 

 

이것이 피타고라스에게 주어진 방편이었다. 피타고라스는 

방편을 가지고 그리스로 갔다. 그리하여 그는 서양의 모든 신비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 


방편은 가장 심오한 명상 테크닉 중의 하나이다. 이를 이해하라. 

'미간에 집중하라......'생리학자들은 미간에는 인간의 

가운데서 가장 신비스러운 부분인 

' `샘(galand)'이 있다고 말한다. 


송과선(pineal galand)이라고 불리는 이 샘은 티벳에서 

'쉬바네트라(shivanetra)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시바의 눈, 

3의 눈, 탄트라의 눈을 뜻한다. 이 눈은 미간에 있다. 그러나 

기능은 아직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외냐하면 아직 그 기능을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에라도 작동될 수는 있지만 저절로는 절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그것을 열기 위해서는 어떤 수련이 필요하다. 


제3의 눈은 눈먼 것이 아니라 닫혀 있을 뿐이다. 

여기 이 방편이 바로 제3의 눈을 여는 테크닉이다. 

눈을 감아라. 그리고 두 눈을 미간에 집중하라. 사물을 보듯이 

그렇게 두 눈썹 사이에 집중하라. 그러나 눈을 떠서는 안된다. 

반드시 눈을 감은 채로여야 한다. 


방편은 가장 간단한 집중법이다. 그대는 사실 몸의 어떤 부분에도 

쉽사리 집중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미간에, 제3의 눈에 

집중하면 그대는 대번에 최면 상태로 들어간다. 두 눈은 제3의 

눈에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이렇게 되면 몸의 

다른 부분으로 주의를 옮기기가 힘들어진다. 이 제3의 눈은 자석과 같다. 

그래서 이 세상의 수많은 방법들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 

방편과 연결되어 있다. 이 방편은 집중하기 가장 간단할 뿐만 아니라 

송과선 그 자체가 집중을 돕고 있는 기능이 있다. 


그것은 자석과 같은 작용으로 그대의 집중력을 끌어당기고 있다.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탄트라 문헌에 따르면 집중은 제3의 눈에게 있어서 음식이라고 한다. 

3의 눈은 배가 고프다. 몇 생 동안을 굶주려 왔다. 

그대가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굶주렸던 것이다. 그대의 

집중력을 제3의 눈에 기울이게 되면 그곳은 되살아나게 된다. 


그곳에 음식이 주어진다. 집중력이 제3의 눈에 있어서 음식인 것이다. 

한번 그대가 거기에 집중하고 나면 그때부터 집중은 어렵지 않다. 

3의 눈 그 자체에 의해서 끌어당겨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처음에 정확한 지점을 아는 것이다. 먼저 두 눈을 감아라. 


그리고 두 눈의 시선을 모아 두 눈썹 한가운데로 옮겨 가라. 


그리고 바로 그 중앙점을 느껴라. 그대의 시선이 중앙점 부근으로 

이동하게 되면 두 눈은 고정될 것이다. 두 눈을 움직이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이때 비로소 그대는 정확한 지점을 포착한 것이다. 

"두 눈썹 사이에 집중하라.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에 머물게 하라." 

그대의 집중력이 정확한 지점에 꽂혔을 때,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 앞에서 사념의 

구름들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 사념의 구름들을 주시하는 주시자이다. 

한번만 이렇게 제3의 눈에 고정되 

그대는 더 이상 사념에 휩쓸려 다니는 노예가 아니다. 

그대는 사념을 지켜보는 주시자가 되는 것이다. 


보통 그대는 주시자가 아니라 사념과 하나가 된다. 화가 날 때 

그대는 화가 된다. 성() 속에 있을 때 그대는 성이 된다. 


욕망 속에 있을 때 그대는 욕망이 된다. 어떤 사념이 그대를 찾아와도 

그대는 그 사념이 된다. 그대와 사념 사이에 어떤 간격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대가 제3의 눈에 한번 집중하게 되면 그때는 사념의 

주시자가 될 것이다. 제 3의 눈을 통해서 그대는 사념들을 구경할 수 있다. 

오가는 군중들을 구경하듯이 그대는 사념의 이동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창문을 통해서 길거리의 사람을 볼 때 그대는 자신을 그 사람들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멀리 떨어져 하나의 방관자로 남는다. 

여기 분노가 있다. 이제 그대는 분노를 볼 수 있다. 


분노를 하나의 사물처럼 볼 수 있다. 이제 그대는 '나는 지금 

화가 났다'라고 느끼지 않는다. 대신 '지금 분노의 구름이 나를 

휩싸고 있다'라고 느낀다. 그대는 '화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이상 화내는 자가 아닐 때 분노는 그 힘을 잃는다. 분노는 

그대를 침범하거나 정복하지 못한다. 분노의 바람이 제 스스로 

불어왔다가 불어갈 뿐,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고요히 남아 있다. 

방편은 '주시자' 를 발견하는 테크닉이다. 이제 그대는 사념들을 구경하라. 

사념들과 만나라. 그대의 집중력이 제3의 눈에 고정될 때 

두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그대는 주시자가 된다. 그대의 몸에 통증이 일어날 때 이를 주시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을 그대 자신이라고 여기지 말라. 

동일시하지 말고 방관자, 주시자가 되라. 그대가 주시하게 되면 

그대의 의식은 제3의 눈에 고정될 것이다. 


둘째, 그 역 또한 성립된다. 그대가 제3의 눈에 '의식을 고정시킴으로써 

그대는 주시할 수 있다. 그대는 사념들을 지켜볼 수 있다. 

기로 호흡의 미묘한 진동을 느낄 수 있다. 호흡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먼저 호흡의 정수(The essence of breathing)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호흡을 할 때 공기로써만 호흡하지 않는다. 


의학은 말한다. -우리는 공기를 통해서 호흡을 한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공기는 단지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공기를 통해서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라는 매개체에 실려오는 프라나(prana)에 희해서 호흡한다.' 


도대체 프라나라는 존재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과학은 아직까지 

그것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몇 사람의 연구가들은 

공기 이상의 신비스러운 어떤 것을 느꼈다. 호흡은 공기를 통해서만 

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기 시작했다.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오르곤(orgone) 에너지라고 

불렀는데 이것 역시 프라나와 같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기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공기라는 매개체 속에는 

오르곤(orgone), 혹은 프라나, 혹은 엘랑 비탈(elan vital)이라 

부르는 것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매우 미묘해서 느끼기 힘들다. 이것들은 비물질적 존재다. 

공기는 물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미묘한 어떤 것이, 

비물질적 어떤 것이 공기를 통해서 움직이고 있다. 

집중하게 되면 그것의 느낌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활기에 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대 속에서도 생명력이 넘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아픈 사람과 같이 있을 때에는 그대 속에서 뭔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같이 느낀다. 그것은 그대의 생명력이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의 공기는 프라나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병원에 가게 되면 그대의 프라나는 그들에게로 흘러나가 버린다. 

그리고 많은 인파 속에 있을 때 왜 그렇게 숨이 막히는가? 


역시 그대의 프라나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숲 속에 

가보라. 그대 속에서 생명력이, 프라나가 넘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프라나가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프라나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여러 번 이 프라나를 경험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미친놈 취급했다. 과학은 그 자신의 미신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공기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이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공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땅 속에 묻힌 채 며칠이고 삼마디( 

)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일은 실지로 이집트에서 있었다. 

1880년부터 40년 동안 공기 하나 통하지 않는 땅 속에 묻혀 

삼마디에 들어가 있다가 나온 사람이 있다. 


당시에 그를 땅 속에 

묻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는 묻힌 후 40년 뒤인 1920년에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40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던 사람이 

살아 나왔다는 것은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는 땅 속에서 나온 뒤에도 10년은 더 살았던 것이다. 

속에서 나올 때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공기가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다. 

"무슨 비법이 있는가?" 

그는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프라나가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깊은 땅속이라도 프라나는 

스며들어 온다는 것이다." 


공기는 땅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프라나는 아무리 

깊은 땅속이라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이를 안다면 매개체 

(공기)가 필요없이 그대는 프라나와 직접 연결될 수 있다. 

그러면 4O년이 아니라 수백 년이라도 땅 속에서 삼마디에 들어 있을 수 있다. 

3의 눈에 집중함으로써 그대는 호흡이 아니라 호흡의 정수, 

프라나를 느낄 수 있다. 이 프라나를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삼사라(윤회 )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로 가득 차게 하라.' 

호흡의 정수를, 프라나를 느낄 때 정수리까지 가득 넘치고 있다고 상상하라. 

어떠한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집중력이 

3의 눈으로 모여들 때 이는 가능하다. 


그대 머리 전체가 이 호흡의 정수로 가득 채워진다고 상상하라. 

이렇게 상상하는 순간 

호흡의 정수는 실제로 사하스라라 차크라에까지 넝치게 된다. 

다음 호흡의 정이 빛이 쏟아지듯 정수리로부터 쏟아지고 있다고 

상상하라. 이렇게 호흡의 정이 쏟아지기 시작할 때, 빛의 샤워 밑에 있을 때 

그대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내적인 재탄생의 의미이다. 

여기 두가지 현상이 있다. 


첫째, 제3의 눈에 집중하게 되면 그대의 상상력은 하나의 파워를 갖게 된다. 

테크닉을 수련하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의 상태가 

순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이 순수는 일반적 순수의 개념과는 다르다. 제3의 눈에 집중하기 전에 

그대의 마음이 순수하지 않을 때 그대의 상상력은 위험하다. 

그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모두 위험하다. 누구를 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그를 죽일 수 있다. 


이때문에 우선 먼저 순수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대는 

여러번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말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대의 

상상력은 행동화되지 못했다. 만일 상상력이 즉시 행동화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할 것이다. 그대 뿐만 아니라 다른사람에게도 말이다. 

그대는 살인하고 싶다는 상상을 수없이 해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3의 눈에 집중력이 고정된다면 

살인하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살인을 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이다. 

최면에 걸린 사람을 보라. 그는 무엇이든지 명령만 들으면 

즉시 행동에 옮긴다. 명령이 좋든, 나쁘든, 불합리하든 그런 것과 

관계없이 그는 명령을 따를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제3의 눈 명상법은 모든 최면술의 기본이다. 


최면을 걸 때 

최면술사는 환자의 시선을 어느 한 지점에 고정시키도록 한다. 

이렇게 그대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될 때 3분 이내에 

그대의 내적 집중력은 제3의 눈 쪽으로 모이게 된다. 그대의 

내적 집중력이 제3의 눈 쪽으로 굽이쳐갈 때 그대 얼굴은 변한다. 

최면술사는 그대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 얼굴에는 모든 생기가 사라져 버린다. 그리하여 그대의 얼굴은 

깊이 잠든 것처럼, 죽은 자처럼 창백해진다. 최면술사는 그대의 

얼굴에서 핏기와 생기가 사라지는 때를 알고 있다. 이는 지금부터 

그대 집중력이 제3의 눈으로 흡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대 얼굴은 죽은 자의 그것처럼 창백하다. 그대의 전 에너지는 

3의 눈을 향하여 흐르고 있다. 


이제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부터 당신은 깊은 잠을 자게 될 것이다"라는 

최면술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대는 깊은 잠을 자게 된다. 

"이제부터 당신의 의식은 무의식 상태가 될 것이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대는 깊은 무의식 상태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최면술사는 길바닥의 돌멩이를 그대 손바닥에 얹어 놓으며 

"그대 손에 불을 얹었다"고 말한다. 


그 순간 그대는 

손바닥이 몹시 뜨겁다고 느긴다. 뿐만 아니라 실지로 손바닥이 

타게 된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대의 모든 

집중력은 제3의 눈에 모여 있다. 그리고 그대의 상상력은 최면술사의 말에 

의해서 암시를 받고 있다. 이 암시를 받은 그대의 상상력은 즉시 행동화한다. 

'지금 당신은 죽는다'라고 최면술사가 말한다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그대는 죽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제3의 눈 때문이다. 제3의 눈에 있어서는 상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둘이 아니다. 상상은 현실이다. 구체적인 

사실이다. 그러므로 꿈과 현실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다. 

꿈은 현실이 된다. 이 때문에 상카라(Shankara)는 말했던 것이다. 

"이 세상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 '신성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신성은 언제나 영원히 이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기에 신성이 꿈꾸는 것은 모두 사실화되는 것이다. 그대 역시 

제3의 눈에 집중하면 그대가 꿈꾸는 것은 모두 사실화될 

것이다. 


3의 눈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꿈이 현실화되듯이 

현실 전체가 그대로 꿈이 될 것이다. 꿈과 현실은 근본적으로 같다. 

"이 세상은 환영이다. 꿈이다."라고 상카라가 말했을 때 이 

말은 단지 이론적인 주장이나 철학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는 구체적인 경험이다. 

3의 눈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의 내면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을 때 프라나가 아침 햇살처럼 

그대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넘치고 있다고 상상하라. 

상상만으로 프라나의 이 충만은 그대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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